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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정석"

[퍼온글]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드(Sigmund Freud)

[퍼온글]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드(Sigmund Freud)


정신분석학의 후계자가된 막내딸 안나 프로이트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프로이트가 살았던 빈 베르크가세의 집.
유대인인 과학사가 찰스 싱어는 ‘모세와 일신교’의 내용을 미리 알고 책을 출판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프로이트에게 보냈다. 프로이트의 응답은 냉랭했다.

‘나는 평생 과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지하며 살아왔소. 그것이 설사 내 동료들에게 불편하고 기쁘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오. 나는 그걸 부정하며 인생을 끝낼 수 없소…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것이오.’ ‘모세와 일신교’는 프로이트가 죽기 4개월 전인 1939년 5월 출판됐다.

판매는 호조를 보였으나 유대인 지식인들이 격렬하게 그를 비난했다. 프로이트는 책이 잘 팔린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비난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노학자는 오히려 이 같은 격렬한 찬반양론 덕분에 조금 젊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프로이트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악명 높은’ 사람이었고, 그 악명 높음을 즐길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황태자 융의 반란
프로이트가 1911년에 출간한 ‘토템과 터부’는 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절정은 자식들이 봉기해서 아버지를 잡아먹는다는 데 있다. 즉 ‘아들들은 아버지를 마법이라 믿었고, 그의 초자연적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아버지를 이상화하고 그를 숭배했다. 이 과정에서 종교가 생겨났다.
’(마크 에드문슨 ‘광기의 해석-프로이트 최후의 2년’) 프로이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료와 학문이었고 가정생활은 그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가족에게 무관심한 아버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아들들을 제치고 막내딸 안나에게 정신분석학을 가르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안나는 아버지 프로이트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이자 학문적 동지였으며, 프로이트가 만년에 가장 의지한 사람이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에 아내 마르타가 아닌 안나의 동의를 구했다.(아동정신분석학자가 된 안나는 아버지가 타계한 후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에서 43년을 더 살다 1982년 세상을 떠났다. 결혼하지 않고 평생 ‘안나 프로이트’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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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Jung at roughly 30 years of age (1905)

애당초 프로이트가 후계자로 점찍어둔 이는 스위스 출신의 신경 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이었다. 정신분석학은 오로지 프로이트라는 한 천재에 의해 태동한 학문이었으며, 그것도 학교가 아닌 임상에서 태어난 사생아 같은 학문이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을 배우려는 사람은 대학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병원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정신분석학을 배우려는 젊은 의사들이 빈 베르크가세 19번지에 있는 프로이트의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1902년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베르크가세의 집에서 맥주를 앞에 둔 토론회가 열렸다. 이 모임이 훗날 ‘국제정신분석학회’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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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ud & Jung with their sweethearts during a brief furlough, ca. 1907

프로이트는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융을 지목했다. 융 외에 카를 아브라함, 산도르 페렌치, 어니스트 존스 등도 프
로이트가 총애한 제자들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첫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기 전, 그들에게 직접 정신분석을 시도했다.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걸린 이 정신분석 과정을 통해 프로이트는 제자들의
무의식을 파악했고, 그 결과 그들의 심리상태와 일거수일투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프로이트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처럼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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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드
1909년 클라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을 방
문할 당시 위풍당당하게 이 ‘아들들’을 이끌고 감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이 ‘토템과 터부’에서 예고했던 것처럼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주동자는 프로이트가 ‘황태자’라고 부른 융이었다. 융은 무의식이 욕망의 근원지가 아니라 지혜의 보고라고 주장했다. 융은 무의식이 의식보다 한결 더 분별력 있고 창조적이라고 본 것이다.


프로이드 구스타브 융

프로이트는 학문적 ‘아들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았지만 아들들이 아버지의 권위, 즉 학문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거인의 어깨에 앉은 난쟁이는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라고 반박하면, 프로이트는 시가에 불을 붙이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렇군, 하지만 천문학자의 어깨에 앉은 사람은 뭘 볼 수 있지?” 융은 격렬한 토론 끝에 1913년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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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ud & Jung fishing halibut off the coast of the Rhine near Düsseldorf, ca. 1909.

20여 년 후 노령의 프로이트가 나치스의 체포 위협을 받고 있
을 때, 융은 히틀러의 열성적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모든 아들이 ‘아버지를 잡아먹은’ 것은 아니었다. 나치스가 오스 트리아를 합병하고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자 영국인 제자 어니스트 존스는 스승의 영국 망명을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다.

결국 영국 정부가 프로이트 일가의 망명을 허가했지 만, 나치스는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프로이트 일가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발목을 잡았다. 이때 또 다른 제자 마리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시앙 보나파르트의 증손녀)가 나서 배상금을 지급함으로써 스물네 명 에 이르는 프로이트 일가족이 무사히 오스트리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죽음
프로이트 일가처럼 온 가족이 망명에 성공한 것은 당시로선 극히 드문 일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스의 증오는 저명인사라고 해서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명인사의 씨를 말리려고 했다. 실제로 슈테판 츠바이크, 발터 벤야민 등 많은 유대인 학자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죽거나 자살했다. 프로이트 역시 온 가족이 죽기에 충분한 양의 독약을 지니고 다녔다. 애당초 그는 빈을 떠날 생각이 없었으며 빈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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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안 프로이드

1938년 3월22일, 게슈타포가 딸이자 후계자인 안나를 연행해
가자 프로이트의 생각이 바뀌었다(연행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날 저녁 늦게 안나는 베르크가세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치스
가 원하는 대로 죽음을 택한다면, ‘삶이 지속되는 동안 그 어떤
것에도 억압받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비록 자신이 가망 없는 암환자이지만, 적어도
나치스의 손에 죽거나 그들의 강압에 의해 죽음을 택해선 안 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1938년 5월, 프로이트는 먼저 영국에
가 있던 아들 에른스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두 가지 희망 때문에 나는 이 잔인한 시간을 견딜 수 있다. 하나는 너와 다시 합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유롭게 죽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1938년 6월4일 마침내 빈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82세였다.


세상에 알려진 프로이트의 사인(死因)은 구강암이다. 1923년 처음 구강암 진단을 받은 이래 프로이트는 16년간 재발을 거듭하는 암과 싸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암으로 죽은 게 아니다. 1939년 9월23일에 프로이트는 모르핀 과다 투여로 인한 쇼크로 사망했다. 그에게 생명을 끊을 정도의 다량의 모르핀을 투여한 사람은 주치의 막스 슈어. 슈어는 프로이트와 한 약속을 지켰다.

암 발병 이래 프로이트는 20년 가까이 죽음을 준비했다. 그는 지성을 유지한 채로 존엄성을 잃지 않으며 죽기를 바랐다. 프로이트가 가장 원한 죽음의 방식은 연구실에서 죽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1929년, 마리 보나파르트의 추천으로 만난 의사 슈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편안하게 죽게 해줄 것. 슈어는 환자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1939년 여름 들어 프로이트의 종양은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됐다. 이미 청신경이 마비돼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암세포는 턱과 눈, 뇌에까지 침입했다. 마침내 조직이 괴사하며 뺨에 구멍이 뚫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턱뼈가 썩으며 악취를 풍기자 파리 떼가 몰려들었다.

안나는 아버지의 침대 주변에 방충망을 쳐야 했다. 가끔 정신을 잃긴 했지만 프로이트의 의식은 또렷했다. 프로이트의 바람대로 그의 병실은 메어스필드 가든 1층의 서재 겸 연구실에 꾸며졌다. 40년 이상 환자들이 누워 그가 개발한 ‘자유연상법’에 따라 이야기하던 장의자에 이제 프로이트 자신이 누웠다. 아마도 그는 삶을 돌이켜보았을 것이다.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다.

빈을 탈출해 자유로워졌으며 1920년 인플루엔자로 사망한 딸 소피를 제외하면 다섯 명의 아들딸이 모두 곁에 있었다. 몇 년 동안 써온 ‘모세와 일신교’도 출판됐다. 프로이트는 더 이상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9월21일 발자크의 소설 ‘상어가죽’을 끝까지 읽고 난 뒤 주치의 슈어를 불렀다.

“우리가 처음 나눴던 대화대로 해주게. 이제 고문받는 느낌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네.” 고문받는 느낌. 그것이 프로이트가 대한 죽음의 얼굴이었다. 안나는 슬퍼하며 아버지의 선택에 동의했다. 슈어는 치사량에 이르는 모르핀을 9월21일과 그 이튿날, 세 번에 걸쳐 투여했다. 프로이트는 독일어로 “고맙네”라고 말한 뒤 곧 의식을 잃었고, 이틀간 혼수상태에 있다 23일 새벽 사망했다. 유대인임에도 평생 무신론자로 산 프로이트는 죽음의 순간에 어떤 종교 의식도 청하지 않았다.

전쟁 같은 인생의 보호자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불굴의 의지로 죽음마저 자신의 방식대로 통제한 프로이트가 끝내 이기지 못한 대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담배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여든한 살까지 담배를 피웠다. 프로이트는 스물네 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잠시 코카인을 맞은 적이 있는데(당시 코카인은 금지 약물이 아니었다), 이때를 제외하고 늘 시가를 물고 살다시피 했다. 많게는 하루 스무 개비 이상의 시가를 피웠다.

구강암이 한참 진행되어 스스로 입을 벌리지 못할 지경에 이
르렀을 때도 집게로 입을 벌리고 시가를 물었다. 프로이트는 1917년에 처음으로 입천장에 종양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시가를 못 피우게 될 게 두려워 6년이나 종양을 방치했다. 1918년, 아직 한창 나이인 62세에 안나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그 스스로 입천장의 종양이 치명적인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튼 프로이트는 6년 동안 종양 발병 사실을 의사에게 알리지 않았고, 시가도 계속 피웠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1923년 4월 프로이트는 구강암 진단과 함께 첫 수술을 받았다. 안나가 정신분석의로 개업한 해였다. 첫 번째 수술 이래로, 프로이트는 16년간 무려 서른두 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종양이 온 얼굴과 턱뼈를 뒤덮고 뺨에 구멍이 뚫리는 지경이 될 때까지 아스피린 외의 어떤 진통제도 거부하면서, 끝끝내 시가를 포기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암과 싸우는 동안 프로이트가 보여준 용기는 실로 영웅적인 것이었다.

그는 암을 ‘내 오랜 친구’라 불렀으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와 암 중에 누가 더 강한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네”라고 썼다. 암의 고통이 격심하게 몰려올 때면 아스피린을 먹은 후 시가를 입에 문 채 글을 썼다. 프로이트에게는 중요한 세 가지 취미가 있었다.
골동품 수집, 개 키우기, 그리고 시가가 그것이다. 이집트와 그리스, 인도 등의 골동품은 지금도 프로이트의 진료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런던으로 급히 망명할 때 프로이트는 수집품들을 빈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런던 망명 후 ‘프로이트 박사가 평생 모은 골동품들을 빈에 남겨두고 왔다’는 신문기사가 나가자, 영국 전역에서 갖가지 골동품이 프로이트의 집으로 배달됐다. 프로이트는 영국인들의 이 같은 마음씀씀이에 감복했지만, 그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보나파르트를 비롯한 제자들의 도움으로 빈의 수집품들이 고스란히 영국으로 건너온 것을 보고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골동품에 대한 집착이나 시가 중독은 결국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프로이트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시가를 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무섭고 맹렬한 상대들도 이겨온 프로이트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흡연을 포기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말에 따르면 ‘시가는 전쟁과도 같은 인생의 보호자이자 무기’였다.

남겨진 사진 속의 프로이트를 보면, 죽기 한 해 전인 여든두 살까지 시가를 피우고 있다. 담배는 그가 투쟁할 대상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담배나 골동품이 주는 안식이나 개들의 충직함 같은 소박한 감정에 의지했다고 해서 프로이트가 나약한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프로이트는 하루 10시간의 진료와 밤 시간의 집필이 계속되는 빡빡한 일상, 그리고 수많은 반대와 경멸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를 지녔더라도 그 역시 한계가 있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무의식을 분석해 인간 심리의 저변을 해석해내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 프로이트도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었다.




프로이드는 사망 할 때까지 24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사망할 무렵 <정신 분석 개론>을 집필하고

있었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발췌글 : http://www.reportworld.co.kr/report/data/view.html?no=207411

사진 : 구글 이미지, liberum 저장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