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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정석"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위키릭스의 주인공들



위대한 ‘외톨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새기다

  • 2013.03.05
  • 조회 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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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자>(1992)
 
사람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인생이 '끝났다'고 여겼다불륜소송흥행 참패 등으로 얼룩졌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7, 80년대쉽게 잊힐만한 잡다한 영화들을 만들거나 출연했고간혹 볼만한 영화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론 커리어가 죽을 쑤고 있었다그러다 그가 은퇴한 총잡이로 출연하고메가폰도 잡아 '서부극의 관습을 몽땅 뒤집은' 역작 <용서받지 못한 자>(1992)가 오스카상을 휩쓴다. ‘주인공은 선한 총잡이로 정도를 지키며악당을 소탕한다는 서부극의 신화를 왕창 깨버린, 정말이지 멋진 영화였다선과 악은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현실이 그런 것처럼그의 마지막 서부극이었고 열 여섯 번째 연출작이었다.그제야 비로소 그는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감독이 됐다. 그의 나이 예순 둘이었다.
 
노장은 귀환한 후 놀라운 영화들을 찍어냈다쉬지 않고 달렸고말그대로 황금기였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앱솔루트 파워>(1997), <미스틱 리버>(2003),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 <그랜  토리노>(2008), <인빅터스>(2009), <히어애프터>(2010), < J. 에드가>(2011), 최근작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2012)까지, 얼추 대표작들만 추려도 이 정도다모두 연출을 맡았고제작한 것도 있으며대부분 주인공으로 출연했다그는 이제 여든이 넘었고영화 인생만50년 넘게 살았다그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 영화인이다그는 지금도 새로운 영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50대면 은퇴해 씁쓸한 잉여가 되고 마는 요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스트우드 DNA’에는 대체 어떤 특별한 점이 있길래?
 
최근 연이어 출간된 두 권의 책『클린트 이스트우드 – 목표 없는 청년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거장의 숨결 - 클린트 이스트우드』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전자는 평전이고후자는 인터뷰집이다목표 없던 청년이 어떻게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을까. 80년간의 일대기를특히 최근 10여 년간 부활한 황금기에 주목한 평전은 중립적인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조명하고자 한다저자 마크 엘리엇은 영화사학자로 여러 유명인들의 전기와 에린 브로코비치와 공저한『에린 브로코비치 그녀가 승리한 이유 Take It from Me』등을 썼던 인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고팠던 1930년대 대공황기에 샌프란시스코, 가난한 떠돌이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무려 5.15kg의 우량아였다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깡마르고 강퍅해 보이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아무튼 키가 193cm로 어디서나 눈에 띄는 장신이었지만, 반대로 너무 내성적인 기질의 소년으로 그는 성장했다. 어려웠던 형편 탓에 어린 시절부터 벌목공, 제지 공장 직원 등으로 일했다. 오클랜드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곤 징집됐다. 군 복무 시절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그는 로스앤젤레스 시티 칼리지에 입학해 연기의 맛을 본다. 이후 배우의 꿈을 안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입성한 클린트 이스트우드하나 여러 단역을 거치며 성격파 배우를 하기엔 잘생겼고정극을 하기엔 모자라다는 평을 듣고 쫓겨나고 만다훗날 세계적인 거장이 될 청년은 할 수 없이 일용직에 기댔다그러다 기회가 찾아왔다. 1959년부터 1965년까지  TV 서부극 <로하이드>에서 주요 배역을 맡아 얼굴을 알리게 된 것이다하나 별로 좋은 평은 듣지 못했다.
 
<황야의 무법자>(1964)
 
할리우드가 애송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업신여기던 시절그의 재능을 알아본 건 유럽이었다당시 무명이었던 이탈리아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에게 발탁돼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 3부작이라 불리는 <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966)에 출연, 박스오피스를 뒤흔드는 일약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하지만 할리우드는 여전히 그에게 최신 유행 아이콘과 싸구려 대중 배우라는 꼬리표를 붙였다아무래도 영화예술 최초의 장르인 서부극(웨스턴)이 1920년대부터 발전해 정통’ 대접을 받아온 데에 반해, 이 장르의 특성을 변형시킨 '스파게티 웨스턴'은 '변종'으로 받아들여졌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주인공은 과다한 폭력을 사용하는 무법자에다 ‘막장 대량 학살’ 총잡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렇더라도 판초를 걸치고 여송연을 느긋하게 입에 물고, 엔리오 모리꼬네의 기묘한 음악 사이로 오직 돈벌이를 위해 총질을 해대며 쾌감을 느끼는 스파게티 웨스턴 속 이름 없는 사나이’이자 ‘마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대중을 사로잡았다.
 
<더티 해리> 시리즈 
 
하지만 그는 단지 스타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았다그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주변에선 만류했지만 1968년 말파소(스페인어로 험한 길이라는 뜻영화사를 차려 저예산 영화들을 찍기 시작했다. 1971년엔 돈 시겔 감독의 갱스터물 <더티 해리>의 과격한 해결사 더티 해리로 출연하면서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이 시리즈는 5편까지 제작되며 큰 인기를 누린다히치콕의 <사이코>에 비견되는 스릴러이자 그의 감독 데뷔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는 흥행도 썩 괜찮았다미 비평가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 편견을 거두지 않았지만그가 지난 40년간 유수 영화 잡지와 했던 인터뷰들을 엮은 『거장의 숨결 - 클린트 이스트우드』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 대해서도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용기를 주었습니다미국에서는 저를 배우로 인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고감독으로 인정하는 데에도 똑같이 시간이 걸렸죠.” 배우 출신 감독에 대한 편견은 꽤 오래 그를 따라 다녔다.
 
이후로도 험한 여정은 계속됐다순탄치 않았던 사생활이 그의 발목을 잡고언론에 스캔들이 공개되고영화 흥행도 별 볼일 없었다. 변화의 전기를 마련한 건연출과 주연을 맡은 <더티 해리 4 - 써든 임팩트>(1983)가 흥행과 비평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면서부터다. 1986년엔 의외의 프로필을 덧붙인다. 길거리에서 품위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바보 같은 관료주의의 절정인 아이스크림콘 조례’ 제정에 격분, 카멜시 시장 선거에 출마에 당선된 것이다시장을 맡은 건 2년뿐이었다. 심지어 그 2년 동안 영화를 두 편이나 만들었다. 그 중 하나인 재즈 황제 찰리 파커의 전기영화 <버드>(1988)는 최초로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의 입지가 커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나는 항상 나 자신을 우파나 좌파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인간으로 여겨 왔습니다저의 정치적 견해는 사실 어느 정당에도 꼭 들어맞지 않고실제로는 자유주의자 쪽에 가깝다고 느낍니다사람들이 평화롭게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요.
  
<그랜 토리노>(2008)
 
짧은 정치 생활 이후, 그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든다.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저는 상관없었습니다적어도 유행을 좇아서 영화를 만들진 않았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들 때도 이미 서부영화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했지만 저는 이건 특별한 이야기입니다새로운 인물이에요라고 말했죠자신이 믿는 것은 그렇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거장의 숨결 - 클린트 이스트우드』 중에서)
 
이 영화의 성공 이후, 예순이 넘은 그는 비로소 시네아스트 대접을 받는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등의 걸작을 쏟아내며 제작자감독배우로서의 재능을 만개한다그 중에서도 <그랜 토리노>는 중요하다우리나라에선 그저 그랬지만, 2009년 미국을 들썩이게 했던 문제작이었다. 그의 최고 흥행작이기도 하다. 자신의 역사가 곧 미국의 현대사이기도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노쇠한 백인 보수주의자로 등장해 숭고한 희생으로 퇴장하는 영화. <황야의 무법자시절부터 <더티 해리시리즈를 건너 30여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줄곧 고수했던 자신의 '사회적 외톨이' 캐릭터를 <그랜 토리노>에 이르러 마무리 지은 것이다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홀로줄곧 영화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이 역전 노장 덕에 대중은 박살난 아메리칸 드림’ 너머의 희망을 구경했다.
 
“과거에 했던 작품을 반복하는 일이라면이 나이 먹고 그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거장의 숨결 - 클린트 이스트우드』 중에서영화인으로서 그는 마초 총잡이도성격 더러운 더티 해리과도 아니었다그가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 변화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찾을 수 있다정통 서부극의 유산과 스파게티 웨스턴의 경향이 혼합된 과도기 속에서 그가 여러 편 찍은 이른바 공포 서부극에서 그는 황야의 난봉꾼이었지만중년의 애틋한 멜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에선 그는 영락없이 사랑의 포로였다. 부녀간의 사랑을 함축한 아름다운 권투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를 만드는가 하면 인간 J. 에드거 후버의 일생을 다룬 전기 영화 < J. 에드가>(2011)도 찍었다.(후버는 극단적인 극우주의자였고권력의 노예였으며미디어 전략가였다그가 동성애자이며 복장도착자라는 소문을 영화가 적극 수용했기 때문인지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았음에도 이 영화는 국내 개봉을 못하고 곧장 DVD로 나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그가 영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경제성'이다싫어하는 것은 컷의 낭비원하는 장면을 첫 테이크에서 뽑는 걸로도 유명하다그를 더티 해리로 만들어준 돈 시겔 감독의 방식과도 닮았다어쩌면 "사는 게 전쟁이었고낭비는 꿈 꿀 수도 없었던" 어린 시절에 터득한 삶의 방식을 영화에도 적용하고 있는 걸지 모른다그는 첨단 기술로 완벽하게 가공한 영화가 아니라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와 연기감정을 중심에 두는 영화의 기본을 중시한다그렇게 관객과 소통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누구보다 빛나는 인생의 황혼기를 쓰고 있는 남자, 비평가들로 하여금 앞으로 그의 신작을 볼 날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한탄하게 만드는 거장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유지영 (교보문고 북뉴스
jygetz@kyobobook.co.kr , twitter.com/jygetz

뜨거운 감자 ‘위키리크스’

  • 2011.03.30
  • 조회 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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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니 무바라크의 사임으로 한고비는 넘겼으나 아직도 갈 길이 먼그러나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 ‘이집트 혁명’을 촉발시킨 원인은 무엇일까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웃한 튀니지에서 일어난 ‘재스민 혁명’에 자극 받은 탓이 크다고 말한다시민이 힘을 합치면 난공불락의 독재정권도 무너뜨릴 수 있음을 똑똑히 본 것이다그런데 이런 자극만으로는 전 국민이 봉기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추동력이 부족할 법 한데때마침 무바라크 독재정권의 비리와 부패상의 적나라함을 담은 전문이 폭로되면서 이집트 시민들의 분노가 일어났고이 분노는 이집트 시민들이 저항의 깃발을 곧추 세우는 기름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런 폭로의 한가운데에는 ‘민중의 정보기관’이라 수 있는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사실 위키리크스의 폭로 명성은 2010 4‘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이라 이름 붙여진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 사건을 찍은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한껏 쌓은 바 있다이 일에 이어 7월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관련된 야전일지 및 기밀문서 7 7,000, 10월의 추악한 이라크 침략과 학살전쟁의 실체가 담긴 39만 건의 문서를 공개하면서 이 폭로가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시한폭탄처럼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전 세계라기보단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즉 미국과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을 좌불안석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요즘 들어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데이는 어쩌면 권력자들의 판정승이 아닌가 하는 우려 아닌 우려를 낳고 있다그도 그럴 것이 위키리크스의 실질적인 1인자인 줄리언 어산지가 스웨덴 여성들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붙잡혔다가 보석으로 석방되긴 했으나 전자발찌를 차고 매일 경찰에 연락하면서 아는 사람 집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신세다더욱이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을 포함한 수십만 건의 미국 국무부의 비밀문서를 시디(CD)에 담아 위키리크스에 넘긴 것으로 알려진 이라크 파병 미군 정보분석병 브래들리 매닝은 영어의 몸이 되어 교도소에 갇혀 있다.
 
 
그뿐이 아니다이 기밀문서들을 폭로하기로 합작한 <가디언>·<슈피겔>·<뉴욕타임스>·<르 몽드>·<엘파이스등 유력지들의 태도도 처음 자료를 건네받았을 때 만큼의 의욕이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더욱이 위키리크스의 운신을 폭을 좁히는 것은 서버를 임대해줬던 아마존이 임대계약을 해지했고이런 활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금줄 역시 거의 모두 차단되고 독일에 있는 비영리단체 ‘바우 홀란트 재단’ 한 곳만 남았을 정도다
 
그러나 이 게임은 끝난 것이 아닌 듯싶다이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뿐이라는 어산지의 말이 빈말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것은 한곳 남았다는 자금처인 바우 홀란트 재단에 엄청난 기부금이 몰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산지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해 세계 곳곳에 수천 개의 미러 서버가 생겨날 정도였으니 말이다그러면서 베일에 가려졌던 위키리크스 실체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최근 들어 출판 분야에서 활약이 눈에 띈다
 
수년 간 어산지는 물론이고 위키리크스의 관계자들과 계속 접촉해왔던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마르셀 로젠바흐와 호거 슈타르크 기자가 함께 쓴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20세기북스와 지금은 위키리크스를 떠난 2인자이자 대변인이었던 다니엘 돔샤이크 베르크가 쓴『위키리크스』지식갤러리가 출간된 것이다.
 
이 두 책은 어쩌면 서로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며 어산지와 위키리크스의 실제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우리들에게 보여준다앞의 책이 외부자의 시선이라면 뒤의 책은 내부자의 시선이란 점에서 그렇다이 책들은 2007년 호주 출신의 유명한 해커인 어산지와 IT 보안전문가이자 프로그래머인 돔샤이크 베르크가 베를린에서 열린 카오스 컴퓨터 클럽 연례회의에서 처음 만났던 이야기에서부터 위키리크스의 탄생브래들리 매닝 같은 정보원들과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기밀문서의 입수과정과 그것을 검증하고 어떻게 공개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 독자들이 가질 많은 궁금증을 해소시켜준다.
 
특히 1인자 어산지는 어떤 인물인지도 잘 알게 해준다어산지는 1971년 호주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고극단적이고 편집증을 가지고 있으며자유로운 사고를 지니고 있고에너지가 넘치는 추정아이큐 140~180의 소유자다. 2인자 돔샤이크 베르크가 위키리크스를 떠난 것은 어산지가 위키리크스를 자신의 조직으로 생각하는 독선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하지만 돔샤이크 베르크르 손에도 위키리크스가 공개하지 않은 상당수의 비밀문서가 들려있다는 점에서 그가 출범을 위해 전념을 쏟고 있는 ‘오픈리크스’에 관심이 모아진다
 
그렇다위키리크스는 ‘비전과 카리스마가 있는 디지털 시대의 체 게바라’답게 아날로그 속의 “권력자들의 수프에 침을 뱉는”지도 모른다극단으로 치닫는 무분별한 테러리스트란 평가도 그닥 거리가 먼 것 같지도 않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이익과 입맛에 따라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면서 뒷담화를 해대며 키득거리는 꼬락서니가 영 봐주기가 그렇다는 점에서 위키리크스는 세계 많은 약소국 국민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효과까지 덤으로 주는 것 같아 아이러니함을 느끼는 것이 나만일까. 
 
좀 성급하긴 하지만 위키리크스가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오고사이트를 오픈한 지 3년도 안 돼 <워싱턴포스트> 30년 해낸 특종보다 더 많은 것을 해내며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로 급부상했다는 평가는 “어산지는 저널리즘의 참된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칼날 위에 올렸다”는 시사주간지 <타임>의 코멘트를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조성일(출판평론가)